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少欲知足

서울특별시 을지로 3가부터 4가에 걸쳐 약 600m 거리에 조명상가가 밀집되어 있는 거리이다.을지로3가부터 4가에 걸쳐 현재 210여 개의 조명상가가 위치해 있다. 이 중에는 30년 이상 오래된 가게들이 많다. 또한 170여 개 가구 업체와 140여 개 타일, 도기 업체가 함께하고 있다.을지로 조명상가는 1970년부터 1980년대에 가장 전성기였다. 전국의 실내장식, 건축 관련 업자들이 조명을 대량 구입해 갈 정도로 한국의 조명중심지였던 곳으로서 산업과 지역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대부분 대량거래를 하는 도매상가이지만 소매가나 도매가를 거의 비슷한 수준에서 책정하고 있어서 시중가보다 최대 절반 정도 할인된 가격에 구매할 수 있다.을지로 조명상가는 이러한 저렴한 가격과 다양한 디자인을 경쟁력으로 갖고 있..

카페 ‘미네르바’는 1975년에 신촌에서 처음 생긴 원두커피 전문점으로, 신촌 일대 카페들의 수장 격이라고 할 수 있는 전통 있는 카페이다.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명물길 18(창천동 13-26)번지에 있는 미네르바는 1975년에 연세대학교의 한 대학원생이 개업하였고, 2000년에 현 대표 현인선씨가 인수하여 미네르바를 이어오고 있다.1970년대 학생이었던 분들의 말로는 창가의 커튼이 없어진 것을 제외하고, 바의 모습과 진열장, 나무 천장, 벽, 격자형 창문 등이 동일하다고 한다. 의자, 테이블, 전등, 난로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시대에 따라 전체적으로 인테리어와 조화가 될 수 있는 선에서 소품을 바꾸고 있지만 원래의 모습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실내에 흐르는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카페 한 편에 꽂아놓..

이화여자대학교 진선미관은 이화여자전문학교 시절인 1935년 학교를 정동에서 신촌으로 옮기면서 새로 지은 건물로,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이화여대길 52에 위치하고 있다. 준공 당시 기숙사로 사용되었으며, 주위의 크고 울창한 나무들과 잘 어울려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석조건물이다.이화여자대학교 진선미관은 뉴욕의 사업가 파이퍼(Pfeiffer) 부부, 캐나다 여선교부, 미국 북감리교 여선교부 등이 기부한 75,000달러를 바탕으로 1935년 당시 우리돈 총 206,200원을 들여 완성한 기숙사 건물이다. 이 건물의 준공으로 150명의 학생을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화여자대학교 진선미관은 지하 1층 지상 4층의 석조건물로 건축면적 1,105.85㎡에 연면적 3,894.15㎡ 규모이다. 6·25전쟁 때 건..

수출의 다리는 서울특별시 금천구 가산동 디지털로에 위치한 교량으로 가산디지털 2단지와 3단지를 잇는 고가차로이다. 1970년대 산업화에 크게 기여한 구로공단 지역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건설된 도로시설물로 1970년 5월에 착공하여 그해 12월에 준공하였다.수출의 다리는 경부선이 지나가는 철길 위에 놓인 고가차로로 기존의 고압선 및 통신선 이설 등이 전제되어야만 하는 어려움에도 구로공단 지역의 원활한 교통소통을 위해 설치된 다리이다. 구로공단에서 생산된 제품들이 이 고가차로를 통해 수출된다는 점에서 ‘수출의 다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 다리의 건설로 경부선 철도 위로 물류수송이 가능해지면서 철도 횡단으로 인한 신호대기가 불필요해지고 철도 사고의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었다.수출의 다리는 1970년 12월 ..

2000년대 들어서 첨단화 계획에 의해 가리봉동 오거리 주변으로 형성된 서울 디지털 산업단지이다.1964년 서울특별시 구로구 구로 3동과 가리봉 2동을 중심으로 구로공단이 형성되었다. 구로공단이란 1960년대 정부의 수출산업육성방안의 일환으로 1963년부터 1973년까지 조성된 한국 최초의 국가계획공업단지를 일컫는다. 90%가 국유지였으며 노동 집약적 섬유·봉제 업체가 주류였다.구로는 서울과 인천 사이를 연결하는 중간 지점으로서 철도 교통이 발달하여 수원을 경유하여 남부지방으로 연결되기에 원활했고 인천항까지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으로 인하여 원료 수입과 수출에 용이했다. 이로 인해 구로공단은 의류나 직물 중심의 경공업을 시작으로 공단이 발달되었다. 이처럼 구로공단은 근대화를 목표로 발전된 곳인 동시에 대한..

구로공단 노동자생활체험관은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 구로공단에서 일했던 여성노동자들의 주거시설인 ‘벌집’을 복원하고, 당시 여성노동자들의 생활상을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조성한 전시공간이다. 서울특별시 금천구 벚꽃로44길 17에 위치한다.구로공단 노동자생활체험관은 우리나라의 산업구조가 굴뚝산업에서 디지털산업으로 급격히 바뀌면서 그 변천 과정과 노동자의 애환을 보여주기 마련한 전시시설이다. 이를 위해 서울시가 지원하고 금천구청이 주관하여 옛 구로공단 노동자들의 생활공간이었던 ‘벌집’과 쪽방을 재현, 2013년 5월 2일에 개관하였다. 구로공단 노동자생활체험관에는 당시 생활상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상설전시관뿐만 아니라 연탄불 갈기, 편지쓰기, 봉제인형 만들기 등의 다양한 체험프로그램이 마련되..

금천예술공장은 금천구 독산동의 옛 인쇄공장을 리모델링한 서울시창작공간으로 글로벌 미학과 로컬의 지역성을 실험하는 신개념 예술 공간이다.금천예술공장은 1970년대 전화기 코일공장에서 1990년대 인쇄공장으로 사용되던 건물을 서울시가 매입하여 시각예술분야 국제 레지던시 스튜디오로 전환하였다. 금천예술공장은 면적 2,358㎡(714.45평), 연면적 3,070㎡에 지하1층, 지상 3층, 창고동(대형 작업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금천예술공장은 문화를 통한 ‘도시재생’이라는 서울시 도시계획의 큰 흐름 아래 설계되었으며 ‘예술가 창작지원’이라는 1차적 목표 외에 과거 ‘구로공단’이 입지해 있던 서울 서남단 지역에 문화적 활기를 불어넣고 지역에 호응하며 정착하는 과제를 안고 출발하였다.2009년 10월에 개관하였으며..

1950년 시흥동에서 개업하여 같은 장소에서 현재까지 운영해 온 중식당이다.동흥관의 시작은 1941년, 현 2대 대표의 어머니인 창업주가 병점거리에서 산동바우즈(왕만두)를 팔면서 시작되었다. 1948년에는 구 시장(현 금천구 시흥동 목련아파트) 위치에서 자장면도 함께 팔다가 1950년 현 위치에서 창업주가 79평 규모로 동흥관을 개업했다.주요 메뉴는 자장면, 탕수육, 조개짬뽕 등이지만 과거에는 짜춘권(계란말이), 군만두, 볶음밥이 대표 메뉴였다. 개업 당시 판매했던 자장면 맛은 산동 지난 지역의 옛날자장으로 현재는 판매하고 있지 않다. 당시 만들던 자장면 재료와 기술은 현재 판매되는 자장면과 달라서 중국에서 재료를 구입해 와야만 만들 수 있다. 개업 당시부터 방문한 손님들은 과거의 자장면을 찾기도 한다...

「을지로 미싱 특화거리」는 현재 중구 을지로4가역에서 청계천 배오개다리 일대에 1960년대부터 형성된 미싱 관련 업종 밀집거리이다.미싱은 1960년대 중반부터 대중화되기 시작한다. 그 효시는 (주)부산정기가 일본의 부라더 공업과 합작하여 생산하여 1965년 출시된 ‘부라더 미싱’이 나오면서부터다. 1970년대만 해도 미싱은 혼수품 목록 1호였다. 당시 서울역 앞에 회전 미싱 광고탑이 세워질 정도였다.1980년대까지 미싱은 혼수품 목록에 자주 올랐다. 특히 80년대 말에는 ‘홈패션’이라는 이름으로 방석ㆍ쿠션ㆍ커튼ㆍ식탁보에서 냄비 손잡이ㆍ전화기커버ㆍ휴지통 덮개에 이르기까지, 생활 수예품이 살림 속에 파고들면서 재봉틀과 바느질 붐이 이어졌다. 이 때 재봉틀 전문상가는 서울청계천 4가와 을지로 4가에 밀집해 있..

조선시대 흥인지문 일대 배오개에 시장이 있었다. 개항으로 청나라 상인과 일본 상인이 서울에 들어왔고,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일본 상인이 서울의 시장을 지배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1905년 배오개시장이 있던 곳을 중심으로 한국인들이 자본을 모아서 광장주식회사가 설립하고 동대문시장을 운영하였다. 일제강점기 동대문시장은 남대문시장과 함께 서울의 대표 시장이었다.한국전쟁 이후 동대문시장은 구호물자와 미군 물자가 많이 들어오고, 북한에서 내려온 월남민들과 피난민들이 동대문 시장 상인으로 참여하면서 동대문 시장 규모가 커졌다. 1960년대 초반 동대문시장에서 광장주식회사가 운영하는 시장이 광장시장으로 분리되었다. 광장시장은 한복을 중심으로 한 포목, 의류, 먹을거리등이 많이 거래된다. 2010년에는 광장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