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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보문고 광화문점은 1981년 독립운동 후원가였던 신용호가 설립한 서점으로, 국내의 대자본이 참여한 최초의 서점으로 교보생명 그룹의 계열사이다. 1981년 교보문고 개업 당시, 단일 층 규모로 세계에서 가장 큰 서점으로 탄생하였으며, 서점의 위치인 세종로 사거리는 당시에도 최상의 입지 조건을 갖춘 곳으로 본점 역할도 수행하였다.1981년 개업 당시, 교보문고는 지하 1층에 자리잡았으며, 약 2천 평 규모에 60만권의 책이 진열되었으며,매장뿐아니라, 문방구점, 카페테리아, 분수대, 휴게실 등의 시설도 마련되었다.2012년 교보문고 본사는 파주출판단지로 이전하였다.교보문고 설립자인 신용호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이육사를 통해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다. 신용호는 우리나라를 대표할 서점을..

신당동 떡볶이골목은 서울특별시 중구 퇴계로76길 50 일대에 조성된 상업지역으로 1950년대부터 형성된 먹거리 특화거리이다. 신당1동에 위치한 이 먹거리 골목은 골목 양쪽으로 떡볶이 전문점들이 길게 늘어서 있어 떡볶이골목이라는 별칭이 생겼다.신당동 떡볶이 골목은 6·25전쟁 직후인 1953년 마복림 할머니가 리어카를 끌며 떡볶이장사를 시작한 데서 비롯된다. 신당동 떡볶이골목이 지금과 같은 골목을 이루게 된 것은 1970년대 후반부터이다. 뒤늦게 시작한 가게에서는 DJ박스를 설치하여 손님들을 끌어모았는데, 이 DJ박스는 신당동 떡볶이골목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떠올랐다. 이때 크게 성장한 이 거리는 40여개 이상의 가게가 성업을 이루기도 하였다. 년 문화체육관광부가 이 일대를 ‘음식테마거리’로 지정하였다.

1960년대 당시에는 청계천 고가도로 아래로 헌책방들이 건물 없이 노점에서 운영되었는데 점차 주변이 개발되면서 책방들이 갈 곳이 없어지자 평화시장 1층에 하나둘 모여들었고 점점 늘어나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초창기에는 청계5·6가의 청계천로를 따라 100여 개가 넘는 서점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가게가 좁아서 대부분의 가게들이 길가에 책을 쌓아놓고 장사했으며 시중에서 구하기 힘든 책을 구할 수 있는 장소로 알려져 있었다.헌책방거리에는 자그마한 매장들이 닥지닥지 붙어 있다. 안과 밖은 어른 키보다 높이 쌓아올린 책들로 가득하다. 책값은 보통 시중보다 30% 정도 싼 가격이지만 희귀성에 따라, 출판된 시기에 따라, 보존 상태에 따라 가격은 천차만별이다.근래 들어 인터넷으로 책을 구매하거나 읽는 문화가 ..

평화시장(平和市場)은 청계천변 가까이 북한 실향민을 중심으로 형성된 무허가시장을 모태로 성장한 의류전문 도매상가로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단로13길 20에 소재한다. 평화시장이라는 명칭은 북한이 고향인 상인들이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취지에서 명명한 데서 유래한다.평화시장은 동대문과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사이에 조성된 전국 최대 규모의 의류전문 도매상가이다. 광복 이후 서울로 사람들이 모이면서 청계천변에 무허가 노점시장이 형성되었는데, 이것이 평화시장의 시작이다. 여기에 6·25전쟁 당시 북한에서 내려온 실향민들이 가세하면서 시장의 기틀이 잡혔다. 1958년 대화재 이후 판자촌들이 사라지고, 1960년대 초반에 지금의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게 되었다.평화시장이 입지한 곳은 1962년 2월에 준공된 지상 3층의 철근콘..

한울삶은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회원들의 생활공동체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신2길 12-8에 위치하고 있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는 과거 민족민주운동 과정에서 숨져간 시민, 학생, 노동자, 군인 등의 유가족들이 모여 결성한 단체로 발족 당시의 명칭은 ‘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였다. 약칭 ‘유가협’이라 한다.유가협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할 국가의 폭력에 자식과 가족을 잃고도 국가로부터 외면당한 유가족들이 1986년 8월 12일 전태일기념사업회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발족한 단체이다. 초대 회장은 노동운동가 전태일의 어머니 고 이소선 여사였다. 한울삶은 ‘한울타리의 삶’이라는 의미로 1989년 유가협이 사무실 겸 주거시설로 사용하기 위해 매입한 건물을 지칭하기도 한다. 한울삶에는 지난 시기 민주화운..

970년 개관한, 신발을 주요품목으로 한 전국 최대 규모의 신발도매시장이다.남대문시장에 있던 신발상가들이 종로5가를 중심으로 이전해 오면서 형성되기 시작했다. 신사화, 숙녀화, 운동화, 등산화 등 국내에서 생산된 다양한 소재와 발전적인 디자인 제품들이 이곳으로 수송된 후 다시 전국 각지의 소매상인에게 판매된다.C동에는 185여 개의 점포에서 신발과 잡화가 유통되고 있으며 260여 명이 종사하고 있다. 개관 초기 주인들은 많이 남아 있지 않으며 부부 또는 젊은 세대가 운영하는 점포가 많아졌다. A, B, C동 중 A동이 가장 먼저 활성화되었으며 현재 B와 C동은 접근성이 좋다.건물의 노후화에 따라 균열 등이 발생하고 있어 전기와 화재 문제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로91길 2(망우동 산57-1) 일대 83만 2,800㎡의 공간에 조성된 묘지공원이다.일제강점기인 1933년 개장하여 1973년까지 40년간 공동묘지로 쓰이면서 역사상 가장 역동적인 시대를 살아간 인물들이 잠들어 있는 동시에 그 시대를 살아간 인물들의 생각(철학), 이야기(문학), 시대정신(역사) 이 담겨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오랜 세월 ‘망우리 공동묘지’라는 이름으로 불려왔으나 서울시는 ‘공동묘지’라는 부정적 인식을 탈피하기 위해 시인 박인환, 화가 이중섭, 이인성을 비롯해 소설가 계용묵, 최학송, 독립운동가 한용운, 방정환, 오세창, 유상규 등 수많은 역사인물들이 잠들어 있는 이곳을 사색과 삶의 철학이 담긴 ‘역사문화공원’으로 재단장하였다.1998년 8월 서울시지명위원회에서 의결..

동부고려제과는 1974년에 서울 중랑구 망우동에서 개업하여 현재까지 같은 장소에서 영업을 이어오고 있는 동네 빵집이다. 망우역사거리 근처 구리 쪽으로 가는 버스정류장에 위치하고 있는 동부고려제과는 중랑구 윈도우 베이커리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현 대표 서정복씨 집안은 우리나라 제빵제과업과 인연이 깊다. 첫째 형(서정현씨)는 ‘로얄제과’에서 근무하면서 제빵 기술을 배웠고, 1960년대 장충단 공원 근처에서 ‘시민제과’를 개업하였다. 셋째 형(서정문 씨)도 1970년경부터 2010년까지 휘경동, 이문동에서 ‘벧엘제과’를 운영하며 제빵제과업에 몸담았다. 첫째 형은 다시 고려제과를 폐업하고, 1974년 중랑구 망우동(현재 위치)에 ‘동부고려제과’를 개업했고, 1993년 09월 첫째 형이 경기도 군포시 산본..

국립극장은 1950년 개관한 종합민족문화센터로서 전통예술을 계승하고 수준 높은 공연작품을 만들며, 혁신적인 교육·전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 우리나라 대표 극장이다.1948년 8월 국립극장 창설에 대한 대통령령이 공포되어 1949년 10월, 국립극장 초대극장장에 유치진(柳致眞, 1905-1974)이 임명되었다.1950년 중구 태평로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의사당 건물)에서 개관, 기념공연으로 역사극 「원술랑」(유치진 작)을 올렸고 제2회 공연 (조우 작)를 올렸다. 제3회 공연 「청춘의 윤리」를 준비하던 중 6.25한국전쟁을 맞이하면서 국립극장은 개관 57일 만에 문을 닫았다.1952년 5월, 대구문화극장 건물에서 국립극장을 재건하면서 제2대 극장장으로 연극인 서항석(徐恒錫, 1900-1985)이 임명..

장충테니스장은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단로에 소재한 테니스장으로, 1971년에 개장해 해마다 10여 개의 각종 대회가 개최되는 대한민국 테니스 역사의 산실이다. 한국 프로테니스 선수 1호 이덕희를 비롯 김봉수, 이형택, 조윤정 등이 이곳을 거쳐간 스타플레이어들이다.장충테니스장은 1971년 당시 테니스협회장이던 고 홍종문(洪鍾文)이 사재 2,500만원을 투입, 시유지에 국제테니스코트를 준공하여 개장하였다. 홍종문은 1965년부터 6년간, 1978년부터 2년간 테니스협회장을 맡아 한국의 테니스 수준을 아시아 정상권으로 끌어올린 인물이다. 특히 장충테니스장의 건립은 그의 가장 큰 업적으로 꼽힌다. 1971년 제4회 아시아주니어테니스 선수권대회 개최를 시작으로 수많은 국내외 대회가 장충테니스장에서 개최되었으며, 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