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少欲知足

학림 사건(學林事件)은 1981년에 신군부 세력이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학생운동조직 등을 반국가단체로 몰아 처벌한 사건이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측 명칭은 '전국민주학생연맹·전국민주노동자연맹 사건'.당시 전민학련이라는 대학생 단체가 첫 모임을 가진 대학로의 '학림다방'에서 유래한 말로 경찰이 숲처럼 무성한 학생운동 조직을 일망타진했다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1999년 뇌병변 장애를 가진 서른 살의 이규식씨는 장애인 야학에 다녀오다 휠체어 이동용 리프트에서 떨어져 다쳤다.장애인 야학은 서울지하철공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고, 500만 원 배상이라는 조정안을 받아냈다.법원으로부터 '이동권'을 인정받은 첫 사례였다. 이후 혜화역에는 엘리베이터가 생겼다. 이씨가 사고를 당하고 2년 후 2001년 경기 시흥 오이도역에서 장애인 노부부가 리프트에서 추락해, 아내가 사망하는 비극이 있었다. "장애인도 안전하게 이동할 권리가 있다"

1966년 서울시의 인구는 약 380만 명이었고 그 가운데 1/3가량이 무허가 판자촌에 살았다특히 청계천과 중랑천에 많이 몰려 살고 있었다정부는 1966~68년 도시미화 정비라는 명목으로 청계천 복개공사를 결정하고 서울전역 4만3천동 무허가 판자촌을 대책도 없이 강제 철거했다1969년 정부가 도시빈민들의 주거권을 박탈하여 광주대단지(성남시)로 강제이주시켰다. *2024년 10월 7일 수정 [인권동판] 청계천 판자촌철거 현장 동판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소실(消失)동판] 청계천 판자촌철거 현장 동판1966년 서울시의 인구는 약 380만 명이었고 그 가운데 1/3가량이 무허가 판자촌에 살았다 특히 청계천과 중...blog.naver.com

대법원(大法院)은 헌법재판소와 함께 대한민국 사법부를 이루는 양대 최고법원으로, 대한민국에서 일부 헌법재판을 제외한 모든 종류의 사건에 대해 관할권을 지닌 법원(일반법원) 조직의 상고심(최고상급심)을 관할하고 있다. 해방 당시에 서소문동 소재 경성복심법원 청사에 위치하였으나, 1995년에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대로 219 (서초동)으로 옮긴 뒤 지금까지 그곳에 자리하고 있다. 일제와 독재시대에 다수의 인권침해 판결을 내렸던 사법부의 과오도 있다. ** 인권동판 자리에 다른 동판이 대신하고 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선조가 의주까지 피난갔다가 서울로 돌아왔을 당시, 궁궐이 모두 불타버려서 거처할 왕궁이 없어서 왕족의 집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완전했던 월산대군가를 행궁으로 삼아 거처하게 된 것이 덕수궁의 시초이다. 덕수궁 대한문 앞 만민공동회, 3.1운동 등 역사의 고비마다 새 뜻을 일으켜 온 왕조시대의 광장이자 늘 오늘인 광장이다.

1987년 5월 27일 야당과 재야, 종교계 등이 힘을 모아 ‘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여당인 민주정의당에서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6월 10일에 맞춰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6 · 10국민대회)’를 치르기로 결정하였다.대학생들은 국본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를 중심으로 6 · 10국민대회에 호응하여 6월 초부터 각 대학별로 연일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6 · 10국민대회 하루 전날인 6월 9일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교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는 곧 혼수상태에 빠졌다.이 소식이 알려지자 학생들은 물론 시민들의 분노가 들끓었다.이러한 분노 속에서 6 · 10국민대회가 열렸다...

군사독재 시기의 남영동 대공분실에서는 대개 민주화 운동을 하던 운동가들에 대한 고문이 자행되었는데,이 건물에서 벌어진 고문사건들이 후에 세상에 알려지면서 역사적 변화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1985년에 당시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의 김근태가 고문기술자 이근안에게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한 사실이 후에 알려졌고, 1987년 1월에는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이 물고문을 받고 사망한 사건이 밝혀졌다.박종철의 고문치사 사건은 19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으며, 같은 해 6월 연세대학교 학생 이한열의 최루탄 피격 사건과 함께 전국민적 저항운동을 일으켜, 결국 군사정권의 포기를 상징하는 노태우의 6.29선언과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냈다.

해직 언론인들은 1984년 12월 19일 전두환 정권에 효과적으로 맞서기 위해 힘을 모아야 할 필요성에 공감하였다.이에 1974년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조선투위) 해직 기자들 그리고 전두환 정권의 언론 통폐합으로 해직된 ‘1980년 해직언론인협의회’ 회원, 출판인 등이 주축이 되어 서울 장충동 성베네딕도회 수도원 피정의 집에서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언협)'를 창립하였다. 당시 민언협은 창립선언문에서 ″언론 민주화란 사회의 전반적 민주화와의 통일적 관계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언론의 민주화 없이 사회의 민주화가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민주화 없이 언론의 민주화가 독립적으로 실현될 수 없음 또한 분명하다.″ 라고 명기하였다.이는 명망가들 중심의 인적 네트워..

3.15 부정선거와 자유당의 독재를 규탄하기 위하여 1960년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서울에서 벌인 학생 시위. '4.18 의거'라고도 한다.평화적인 시위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정부가 동원한 정치깡패들이 시위 후 돌아가는 학생 시위대를 습격하여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국민들이 분노하게 되어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