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少欲知足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동 일대에 있던 구 국군보안사령부 소속 대공분실. 서빙고역 맞은편에 있었으나 현재는 철거되고 군인아파트가 들어서있다.서빙고 분실은 1968년 육군보안사령부 창설 이후 방첩활동을 위해 초대 보안사령관 김재규가 비밀리에 만든 취조실이었다. 간첩, 반정부 인사들을 비롯한, 국가 체제에 위협이 되는 인물들을 데리고 온 후 수사하는 것이 본 기능이었던 것.그러나 실상은 그저 군사독재 시기에 군부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행되던 각종 공작과 수사의 본산이었다. 특히 멀쩡히 걸어갔던 사람도 이 곳을 다녀오면 심하게 다치거나 불구가 되는 일도 허다할 정도로 악명 높은 공포의 현장이었다. 당장 10.26 사건의 주범이자 이 시설을 만든 장본인 김재규마저도 자신이 만든 분실에서 어떠한 특혜..

구로동맹파업은 1985년 6월 24일부터 29일까지 구로지역의 민주노조들이 노조운동탄압에 맞서 벌인 동맹파업과 지지연대투쟁이다.한국전쟁 이후최초의 노동자 정치투쟁인 구로동맹파업은 정권의 탄압에도 노동자들이 기업별노조의 틀을 뛰어 넘어 정치적 연대투쟁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또한 구로동맹파업은 민족민주운동세력의 적극적인 지지를 이끌어내 노동운동이 사회민주화를 위한 저항 주체로 성장하게 한 반독재민주화투쟁이었다.

1991년 9월 17일 밤,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당시 신림2동 파출소를 표적으로 기습시위를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시위에 미처 대비를 못하고 있다가 당황한 경찰은 실탄과 공포탄을 쏘며 맞섰다. 당시 파출소장이던 조 모 경위의 총에서 공포탄 2발과 실탄 5발, 그리고 변 모 경장의 총에서 공포탄 2발과 실탄 1발 등 총 10발의 총탄이 발사되었다.이 과정에서 길 건너편, 현재 서울산업정보학교 앞에 서 있던 한국원(27살)이 경찰이 쏜 총탄을 맞아 병원으로 옮기던 중 사망하였다.당시 그는 서울대 공업화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었으며, 갓 결혼한 부인과 함께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 보고 귀가하던중에 잠시 시위 장면을 바라보고 있다가 변을 당한것이다. 이 사건에 대한 국민의 관심과 분노를 형식적으로나마 달래려고 ..

광주항쟁 8주기를 맞이하는 지난 88년 5월15일 명동성당 구내 교육관 4층 옥상에서 당시 명동 천주교회 청년단체 연합회(명청연) 소속 가톨릭 민속연구회장이었던 조성만 동지가 할복, 투신했다.조성만 동지는 ‘양심수 전원 석방 및 수배자 해제 촉구 결의대회’가 열리고 있던 오후 3시30분 무렵 교육관 옥상에 나타나 ‘조국통일 가로막는 미국놈들 몰아내자’ ‘분단상황 고착화하는 미제놈들 몰아내자’ ‘올림픽 공동 개최하여 조국 통일 앞당기자’ ‘광주학살 진상규명 노태우를 처단하자’ ‘양심수 전원 석방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5장의 자필 유서를 뿌리고 자신의 배를 찌른 뒤 거꾸로 투신했다. 조성만 동지는 투신 후 즉시 백병원 응급실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투신때 입은 두개골 손상으로 인해 오후 4시30분 뇌사상태..

1979년 4월 29일시내버스 안내양 40여명이 처우개선과 부당해고 철회를 요구했던 ‘새한버스 기숙사 터

한양도성에는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4대문은 북쪽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숙정문 · 흥인지문 · 숭례문 · 돈의문이며 4소문은 서북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창의문 · 혜화문 · 광희문 · 소의문이다. 이 중 돈의문과 소의문은 멸실되었다. 또한 도성 밖으로 물길을 잇기 위해 흥인지문 남쪽에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을 두었다.

1980년대에 공해문제 해결을 위한 환경운동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으며,공해추방운동도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전문적인 환경운동단체로서 한국공해문제연구소, 반공해운동협의회가각각 1982년과 1984년에 결성되어 운동을 추동했다.공해추방운동연합이 결성됨으로써 환경운동은 본격적인 궤도로 진입할 수 있었다. 성장한 공해추방운동연합은 1993년 4월 2일 전국의 8개 민간 환경단체와 통합해환경운동연합을 창립했다.

높이 14.28m, 너비 11.48m 크기의 문으로, 자주민권과 자강운동의 기념물이다.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이후 자주독립의 결의를 다짐하려고중국 사신을 영접하여 사대외교의 표상으로 인식된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건립하였다.곧 1896년(건양 1)에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徐載弼)은 독립협회를 조직하고서1896년 11월 21일에 정초식(定礎式)을 거행하고, 1년 뒤인 1897년 11월 20일에 완공하였다. 1979년에 성산대로 공사로 인해 원래의 위치에서 서북쪽으로 70m 떨어진 지점으로 옮겼다.원래 자리에는 ‘독립문지. 이전일자 1979. 7. 13. 서울특별시장’이라고 새긴가로·세로 각 70㎝ 크기의 기념동판을 묻었다.이전공사는 1980년 1월에 마쳤다.

서대문형무소(西大門刑務所, 'Former Seodaemun Prison, Seoul')는 일제 통감부가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운동가들을 투옥하기 위해 1907년에 오늘날의 서대문구 지역에 건설하여 1908년 10월에 문을 연 감옥을 가리키는 말이다. 해방 후에는 주로 서울 구치소라 불리며 많은 시국사범들이 수감되었다. 서울 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하면서 1987년 10월에 폐쇄되었고, 그 후로 역사성과 보존가치 등을 고려하여 일부 시설을 철거한 뒤 나머지 시설들이 1988년 2월 27일에 대한민국의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998년 11월 5일부터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가 관리하는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으로 재개장하였으며, 1992년부터는 서대문구 현저동에 위치한 독립공원의 주요시설로 기능하고 있다

1961년에, 서울에서 진보적 정치 세력의 주장을 대변하기 위하여 창간한 일간 신문.이 신문은 ‘민족의 진로를 가리키는 신문, 부정부패를 고발하는 신문,노동대중의 권익을 옹호하는 신문, 양단된 조국의 비애를 호소하는 신문’임을 표방하였고,당시 혁신계의 주장인 남북협상·남북교류·중립화통일·민족자주통일 등을 강력하게 내세웠다.그러나 5·16이 일어나자 반국가적·반혁명적 신문이라는 이유로 5월 17일부터 신문발행이 정지되었고,19일 계엄사령부로부터 폐간처분을 받아 3개월 만에 종간되었다.그뒤 8월 21일 혁명재판소는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 위반혐의로이 신문의 관련간부 13명을 재판에 회부하였다.기소된 재판에서는 “공산당 자금으로 신문을 발행함으로써 특수반국가행위에 해당하는 활동을 하였다.”는 죄목으로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