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 민우회
- 2023 여성노동자대회
- 여성가족부
- 여성의날
- 1029
- 양성평등
- 8888
- 3·8 세계여성의날
- 세월호
- 여성가족부 폐지 저지
- 38여성의날
- 1029참사
- standwithmyanmark
- 노조법 2·3조
- 추모촛불
- 성폭력
- 강간죄 개정
- 임신중지
- 차별금지
- 수요시위
- 고용평등상담실
- 38여성대회
- 고용평등상담실폐지중단
- 채용성차별
- 일본 방사성 오염수 해양투기 저지
- 민우총회
- Today
- Total
목록바닥동판 (105)
少欲知足

1908년 9월 경시청은 기생 단속령과 창기 단속령을 발표했고, 이 법을 근거로 1908년 10월 이후 최초의 기생조합이 결성되었다. 초기에는 이 조직을 ‘기생조합’으로 불렀다. 그러나 1909년 창기조합(시동기생조합)이 결성되었고, 또 이후로도 다수의 기생조합이 결성되면서 최초로 결성된 조직을 한성기생조합이라고 불렀다. 한성기생조합의 조합 사무실이 광교에 있었으므로 세간에서는 이를 광교조합이라고도 불렀다. 1910년에 무교정 92번지에 이사했고, 1918년 1월 이후로 한성권번이라고 개칭했다.

십이칠법난(十二七法難)은 1980년에 신군부가 불교계 정화를 명분으로 대한불교조계종 승려 및 관련자들을 강제로 연행해 수사한 사건이다. 153명이 강제 연행되어 수사를 받았고, 전국의 사찰 및 암자에서도 불순분자를 검거한다는 구실로 1,776명이 검거되었다. 이는 계엄령 상태에서 국가 공권력을 남용한 대표적인 사례로, 정권의 유지와 안정을 위해 헌법에 규정된 정교분리의 원칙을 위반하고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 행위이다.

1986년 3월에 문을 연 ‘민’은 9년 동안의 역사적 책무를 다하고 1994년 말에 문을 닫았다. 한국 미술이 최초로 사회운동의 주체로 나선 1980년대 ‘민’의 탄생은 시대적 요구였다. 그 시절, 민중미술과 민미협(민족미술협의회)과 ‘민’은 하나의 유기체였다. 1980년대 초반에 결성된 광주자유미술인협의회, 현실과 발언, 두렁, 임술년 등의 미술동인은 억압적인 정치 현실과 고답적이고 관념적인 기성 화단을 비판하는 리얼리즘 미술운동을 펴나갔다.1985년 7월, 민중미술가들은 아랍미술관에서 이라는 청년작가연립전을 연다. 전시장은 연일 관람객들로 성황을 이루었다. 지속적인 민중의 저항으로 수세에 몰리던 정권은 이와 같은 미술계의 움직임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자 물리력을 동원해 탄압하기에 이른다. 전시 8..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에 있는 공원. 조선시대 중종 때, 원각사 건물이 모두 헐려나간 빈 터에 공원이 조성되었다.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가 낭독 되었으며, 1992년 파고다공원에서 탑골공원으로 개칭했다. 팔각정을 중심으로 3·1운동 기념탑, 3·1운동 벽화, 의암 손병희 동상, 한용운 기념비 등과 원각사지 10층석탑, 대원각사비등의 문화재가 있다. 급증하는 노인인구의 인권과 복지를 재고케 한 상징적 공간이다.

조선 초기의 승려였던 무학대사의 호에서 따온 도로 무학로가 지나는데에서 유래했다. 무학로의 이름은 무학대사가 도읍을 정하기 위해 여러 곳을 돌던 중 왕십리까지 왔다는 설화에서 유래하였다.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에는 없었고 2000년대에 청계천 복원공사를 하면서 새로 지은 다리이다. 현대건설에서 시공했으며 2005년 9월 30일에 준공했다.

1970년대까지 '인쇄골목'으로 자부한 곳은 중구 을지로 장교동 일대였다. 6ㆍ25 전쟁뒤 한지상들이 많이 있던 장교동 일대에 인쇄업체들이 자연스레 몰려들면서 인쇄골목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을지로 인쇄골목이 성황을 이루자 이웃한 충무로의 인쇄골목도 제법 규모를 갖춰갔다. 1960년대 말부터 주변에 세운상가, 진양상가, 풍전상가가 들어선 것도 계기가 됐다.1984년은 대전환점이었다. 을지로 장교동 일대가 재개발로 헐리면서 500여곳의 인쇄업체가 충무로로 자리를 옮겼다. 다섯 명도 안 되는 직원에, 10평 미만의 좁은 공간에서 일하던 터라 영쇄 업자들은 충무로로 이전했다. 서울시는 충무로 인쇄골목에도 이전명령을 내렸지만 소용 없었다. 그리고 지금의 충무로 인쇄골목이 태어났다. 이 때부터 '인쇄골목'은..

서울시 성북구 석관동 산 1-5번지. 의릉은 조선 20대 임금 경종과 그의 계비 선의왕후의 능이다. 숙종과 희빈 장씨의 아들로 태어난 경종은 당쟁의 와중에서 어미를 잃었고, 즉위 4년 만에 후사도 남기지 못하고 37세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의릉의 수난은 1962년 중앙정보부가 들어오면서 시작됐다. 초대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은 몇 군데 후보지를 놓고 고심하던 끝에 최종적으로 의릉을 낙점했다고 한다. 왕릉 부지를 꿰찬 중앙정보부는 1995년 국가정보원이 내곡동 신청사로 이전하기까지 30여 년 동안‘ 정부 위의 비밀 정부’로 군림하며, 의릉 경역을 마음대로 유린하고 훼손했다. 마구잡이로 건물을 지었으며, 인공 연못과 일본식 정원, 잔디구장을 조성했다.**2024년 1월 29일 현재, 유실되고 없다,.

종로5가에 위치한 기독교회관(현재는 구관)은 일명 `종로5가권`이라고 불린 `반체제` 목사들의 주요 활동 무대가 되었는데, 1977년 12월 29일에는 `한국인권운동협의회`가 발족되었다. 이 조직은 78년 1월 24일 결성을 공표하면서, 기독교와 비기독교, 신교와 구교, 교파와 직업을 뛰어넘어 민주주의와 인권의 회복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향해 각계각층의 힘과 지혜를 결집할 것을 선언하기도 하였다. 또한 종로기독교 회관은 80년 5월 `광주의 비극`을 처음으로 알리면서, 그 치열했던 80년대 반독재민주화 투쟁의 서막을 열었던 서강대생 김의기가 80년 5월말 투신자살한 현장으로도 기록되어 있다.

6·25 전쟁을 겪은 1950년대의 혼란한 정치 상황에서 민주주의는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서울대학교도 이제 막 터를 잡기 시작한 처지에서 학생들의 정치적 각성도 본격화되지 않았으나, 이승만 정권의 전횡이 더해가면서 학생들도 깨어나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정점을 이룬 사건이 4·19혁명이었다. 3월 방학을 마치고 4월 개강한 서울대생들도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기 위해 움직였다. 4월 11일 김주열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된 직후인 4월 14일 문리대 정치학과 3학년 학생들은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를 결의하여 11개 단과대학이 함께 19일 오전 11시에 궐기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