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少欲知足
[미래유산] 디지털단지오거리 본문
2000년대 들어서 첨단화 계획에 의해 가리봉동 오거리 주변으로 형성된 서울 디지털 산업단지이다.
1964년 서울특별시 구로구 구로 3동과 가리봉 2동을 중심으로 구로공단이 형성되었다. 구로공단이란 1960년대 정부의 수출산업육성방안의 일환으로 1963년부터 1973년까지 조성된 한국 최초의 국가계획공업단지를 일컫는다. 90%가 국유지였으며 노동 집약적 섬유·봉제 업체가 주류였다.
구로는 서울과 인천 사이를 연결하는 중간 지점으로서 철도 교통이 발달하여 수원을 경유하여 남부지방으로 연결되기에 원활했고 인천항까지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으로 인하여 원료 수입과 수출에 용이했다. 이로 인해 구로공단은 의류나 직물 중심의 경공업을 시작으로 공단이 발달되었다. 이처럼 구로공단은 근대화를 목표로 발전된 곳인 동시에 대한민국 산업화의 모델을 제공한 곳이다.
1960년대 구로공단의 미혼 남녀 노동자들은 혼자 서울로 상경한 지방 청년들이었다. 이들 중 여성 인구의 절반 정도는 15~19세의 어린 여성들이었다. 서울을 마주한 어린 여성의 설렘과 두려움, 고단함이 거주한 곳이 일명 ‘벌집’이었다. 이때부터 1980년대까지 구로공단은 한국의 노동집약적 산업이 집중된 공간이었다. 아울러 주변 상권 또한 활성화되었다.
1970~1980년대 가리봉동은 대한민국 경제 성장을 이끄는 동시에 노동 운동의 메카였다. 1987년 8월부터 1989년 말까지 총 95개의 노조, 14,011명의 노동자가 신규로 조합원이 되었다. 산업화 시대의 경제화 상징과 가난과 노동 운동의 핵심 등 구로공단의 역설적 역사는 문학과 예술계의 다양한 소재로 활용되었다.
2010년 이후 ‘가리봉균형발전촉진지구 개발사업’이 시행되어 이러한 가리봉의 장소성도 역사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다. 옛 가리봉 오거리는 공장, 벌집, 가리봉시장, 야학 등 1960년대 이후부터 구로공단 근로자들의 생활 및 기억을 보여줄 수 있는 공간들은 영화 세트장 등으로 활용될 수 있다.
서울시는 구로고가차도의 노후화와 도시미관 저해로 인한 주민 불편을 해소하기 위하여 구로고가차도를 철거하고, 2019년 남부순환로 디지털단지오거리 보도의 확장공사를 완료하여 8월부터 개통하였다. 차로는 왕복 8차로에서 10차로로 늘었났으며, 보행로도 폭 3m 이상으로 확장되었다.
2000년대에 들어선 구로공단은 디지털단지로 이름을 바꾸고 산업구조의 변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구로공단은 국가의 정책에 의해 형성되었고 현재도 국가의 정책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 2000년에는 구로단지가 첨단화계획으로 ‘서울 디지털 산업단지’로 변경되었으며 현재 패션몰과 패션거리를 형성하여 의류의 메카로 발돋움하기 위해 거리 정비 등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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