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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유산] 국선옻칠

知足 2024. 4. 20. 16:42
「국선옻칠」은 1977년 종로구의 광장시장 2층에 오세운이 개업한 옻공방이다. 개업 당시에는 ‘신일공예사’라는 이름이었다.

나전칠기는 칠공예의 장식기법 중 하나로, ‘나전(螺鈿)’은 얇게 간 조개껍데기를 여러 가지 형태로 오려내어 기물의 표면에 감입시켜 꾸미는 것을 통칭한다. 나무 틀 위에 옻칠을 하고 말린 뒤에 구부러진 조개껍질을 얇게 펴 모양을 내고 사포질을 하는 과정을 5~6번 반복하면서 하나의 제품이 나오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최소 한 달에서 두 달이 걸린다. 장인의 노력과 인내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나전칠기 작업을 40년 이상 해온 오세운 대표는 경북 상주에서 19살 때 취업을 위해서 서울로 상경하여 숙식을 제공해주던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나전칠기와 인연이 시작되었다.

2019년 8월 13일 『뉴스포스트』의 “국선옻칠, 옛것이 빛나는 시간여행” 제하의 기사에서 오세운 대표는 국선옻칠을 시작하게 된 계기와 해외 판매 경험, 후대 계승 과정 등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 당시(1960년대)에는 일의 전망을 따지고 할 여유도 없었어요. 의식주 해결이 된다면 월급이 적은 건 문제가 아니었죠. 형 밑에서 2~3일 지내면서 일할 곳을 수소문했고 우연한 기회에 나전칠기 하는 공장을 가게 됐어요. 공장에 취직해 몇 달 일하고 오천 원을 받았던 기억이 나네요.”

공장 생활을 3년 정도 하고 나전칠기 가게에서 직원으로 일하게 된 오세운 대표는 나전칠기의 판매와 유통 및 제조에 대해서 익히고 1977년 광장시장 2층에 ‘신일공예사’를 개업하였다. 당시 생활필수품이 아니었던 나전칠기는 국내에서는 수요가 많지 않았고, 고가이다 보니 상류층이나 1960년대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많이 판매하였다. 1980년대에는 국내 기업들이 해외시장으로 진출을 본격화하자 외국에 비즈니스 선물용으로 많이 구매하기도 하였다.

“1965년 한일수교 이후 일본 관광객이 많아지면서 나전칠기 수요가 많이 늘었어요. 일본에도 자개가 있지만 큰 규모의 작품 위주로 비용이 비쌌죠. 대신 우리나라는 보석함 등 관광상품으로 내놨기 때문에 많이들 사갔고 그래서 나전칠기 시장도 커졌어요.”

오세운 대표는 2008년 장남 오명호를 설득하여 공동운영을 시작하였다. 전망이 없다고 판단해 경찰공무원을 준비하고 있던 아들에게 한 달만 가게에 나와 보라는 권유를 했고, 한 달 후 ‘쇼핑몰’사업을 한다는 조건으로 경영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쇼핑몰 계획이 없던 오세운 대표는 큰 기대 없이 쇼핑몰을 시작했다가 예상 밖의 성과를 거두었다.

“아들이 함께하면서 사업이 한 단계 발전한 느낌이 들어요. 내가 혼자 계속했으면 기존의 것 그대로 이어가는 정도였겠지요. 젊은 세대의 아이디어는 기성세대가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과감히 바꾸고 두려움을 떨쳐버리면 새로운 것이 보이는 것 같아요.”

이후 오명호 대표는 문화재기능인 자격증을 취득하여 자신의 이름을 건 작품으로 내보였고 2012년에는 가게 이름도 ‘국선(國善)옻칠’로 변경하였다. 나라를 선하게 하는 기업이 옻칠을 한다는 의미이다. 경기도 남양주에 대규모 납품을 위한 공장도 마련하였지만 전통산업의 성장 기반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나전칠기는 관광상품으로 외국인들이 사 가며 한국 홍보가 될 수 있는 업종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지금 현실은 우물 안 개구리입니다. 국제적으로 알리고 우리나라 전통을 홍보할 수 있는 망이 필요한데 지원이 너무 부족해요. 정부에서 전통산업에 종사하는 기업 중 대표 기업으로 육성해서 신생 기업들이 견학도 오고 자문도 구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면 좋겠어요.”

2020년 상호명을 ‘신일공예사’로 다시 변경한 ‘국선옻칠’은 나전칠기라는 전통공예를 산업화하여 국내외 시장을 개척하고 미래세대에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서울미래유산이다.

입구

광장시장 내
계단으로 올라 가서 2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