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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성명] 차별해소를 거짓명분으로 세우는 권고안을 철회하라

知足 2022. 12. 15. 10:35

차별해소를 거짓명분으로 세우는 권고안을 철회하라

- 여성노동자의 삶을 기만하는 미래노동시장 연구회 권고문에 부쳐 -

 

‘일주일 120시간 바짝 일하고 마음껏 쉴 수 있어야’, 후보시절 망언이 현실로

윤정부는 임기 반년 만에 ‘미래노동시장 연구회’(이하 연구회)라는 전문가 집단의 권고안을 앞세워 노동 개악을 선포했다. 권고안은 △기존 ‘주’ 단위로 상한을 두었던 52시간 연장근로시간 제한을 ‘월’단위, ‘년’단위로 확대하여 장시간 노동을 극대화하고 △임금체계를 기존 연공급제에서 직무급제로 변경 △노동시장을 정부 규제 중심이 아닌 노사 자율합의에 맡겨야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비판적 여론을 고려하여 업무 시간 사이 11시간 휴게시간을 의무화하겠다고 발표했지만 현재 권고안이 현실이 됐을 때, 노동자는 연속휴식이 보장되어도 80.5시간, 1주에 하루를 쉬어도 69시간을 일하게 되는 환경에 노출되게 된다. 또한 11시간의 휴게시간이란 것은 노동자의 시간에 대한 일방적 재단에 불과하다. 삶은 노동과 휴식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의 자율성을 높이고’ ‘성과에 대한 보상을 원하는 MZ세대의 만족도를 높이겠다’ ‘여성이 경력단절, 차별 없이 일할 수 있게 하겠다’ ‘이분화된 노동시장에서 임금격차를 줄이겠다’ 등 허울 좋은 문구들을 늘어놓고 있지만 찬찬히 권고안을 뜯어보면, 노동자의 삶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기업 중심의 노동시장 개편을 꾀하고 있음을 바로 알아볼 수 있다.

 

 

누구를 위한 개혁인가? 사실상 노동권의 심각한 후퇴

현재에도 많은 여성노동자들이 장시간노동으로 인해 ‘정신적 에너지가 고갈된다’ ‘감정노동자라서 근무시간이 늘어나면 내가 나에게 나쁜 짓을 할 것 같다’ ‘과로와 수면부족으로 인해 불면증, 신경이상 등 여러 질환을 앓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2022 내 시간의 주인은 누구?: 종속과 자율 사이, 여성노동자의 시간주권 찾기, 한국여성민우회]. 더욱이 노동시간이 기업 편의에 맞춰 유연화될 때 직격탄을 맞는 것은 바로 다름 아닌 여성노동자의 삶이다. 기업은 이미 유연근무제를 확대하고 있지만 사실상 노동자의 자율보다는 기업의 상황에 맞춰 노동시간이 늘어난 경우가 다수다. 장시간 업무에 언제든지 호출될 수 있는 노동자는 돌볼 사람이 없는, 혹은 타인의 돌봄을 받고 있는 남성들이다. 사업주가 초과근무를 요구할수록 돌봄 노동자로 호명되어 온 여성노동자들은 노동시장에서 이탈할 수밖에 없고 단시간, 비정규직, 질이 낮은 일자리로 밀려난다.

장시간 노동에서 그나마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것은 법적규제(주 52시간 연장근로 상한)와 노동조합의 견제뿐이다. 연구회의 권고안은 “빠르게 변화하는 노동시장을 제도와 정부가 획일적으로 규율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중략) 노사 당사자의 이해관계는 ‘자율’의 힘으로 조정되어야 합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권고안이 추진하는 ‘개혁안’은 노동자의 노동시간 보호를 위한 최소한의 제한마저 무력화하고 있으며, 사업주가 기업의 편의에 맞게 노동시간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무한한 권한을 쥐어주는 노동개악에 더 가깝다.

 

 

직무급이 성별임금격차해소를 위해 필요하다는 거짓명분을 중단하라.

권고안은 세대 간 불공정, 성별임금격차 해소를 위한 임금체계로 직무급제의 도입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직종, 직무, 승진, 근속, 노동형태 등에 있어 차별받고 있는 성차별적인 노동시장의 현실 개선 없이 직무급 도입만으로 성별임금격차는 해소될 수 없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공정’이라는 명분으로 노동자를 차별하는 능력주의가 팽배한 상황이다. 게다가 정부는 구조적 성차별을 부정하면서 “여성도 각자 능력을 발휘해 노동시장에서 좋은 일자리를 가질 수 있다”고 현실을 호도한다. 이런 상황에서 무분별하게 직무급제를 도입한다면, 기존의 성차별 기준이 직무평가 과정에 반영될 우려가 크다. 이런 경우 여성집중직종의 직무를 저평가하면서 오히려 노동시장내 성차별이 고착화될 것이다. 여성이 일터에서 겪는 차별은 개인 능력의 문제로 치부될 것이다. 여성이 집중된 서비스/돌봄/사무직이 공평하게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는 환경에서 직무급제는 또 다른 차별을 낳는다. 더욱이 저평가된 여성집중 직무는 연공급의 혜택도 없이 오래 일해도 최저임금에 머무르는 저임금의 늪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구조적 성차별을 부정하고, 여성가족부 해체를 줄기차게 조장하는 정부가 직무급 도입이 성별임금격차해소를 위해 필요하다는 것은 거짓 명분에 불과하다. 성별임금격차해소가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직무급도입을 말하기 전에, 노동시장 안에 구조적인 성차별을 인정하고 개선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부터 이야기했어야 한다.

 

 

“이게 오티(초과노동)를 그렇게 장시간, 장기간 하다 보면 지쳐서 그만하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이 하게 돼요.

지치는데도 불구하고 사측 강요로 그냥 일정표를 (회사 측에서) 짜서 돌리니까요”

 

“‘평이한 상태의 업무시간이 안정적으로 유지가 되면 좋겠다.’ 이 정도만이라도. ‘갑자기 막 뛰어다니고

그런 일 좀 없었으면’. 그 정도만 돼도 만족할 것 같아요.

업무시간 자체가 회사 프로젝트에 따라서 막 흔들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일주일에 80시간 이상 노동, 돌봄과 노동을 분리하는 정책이다.

주 80시간 일하는 노동자는 급하게 귀가해서 부족한 수면을 취하는 것 외에 다른 일상을 꾸릴 수 있을까? 노동자는 일정 시간 휴게시간만 지켜주면 얼마든지 계속해서 일할 수 있는 ‘기계’가 아니다. 삶은 함께하는 인간관계가 있고, 건강을 위해 스스로 요리도 하고 여유를 가져야 하고,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서 집을 돌봐야 한다. ‘노동’은 기업의 성취를 위해 저축했다 언제든지 끌어다 쓸 수 있는 자본이 아님을 의미한다. 노동자의 자율권 확대한다는 명목 아래 발표된 권고안에는 개인이 사용자의 초과근무 요구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는 어디에도 없다.

노동자가 안정된 삶을 꾸리기 위해서는 예측할 수 있는 업무, 본인이 통제 가능한 시간 분배가 필요하다. 노조 조직률이 낮은 국내 현실에서 노사 선택 재량에 맡긴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세계는 ‘보편적 노동시간 단축’을 향해 가는데 한국 정부는 이를 역행하는 노동개편안을 발표했다. 2021년 OECD 집계 한국의 연간 노동시간은 1,915시간으로 OECD 평균보다 200시간 가까이 많다. 성별임금격차는 31.1%로 OECD 가입(1996년) 이후 26년째 불명예스러운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구조적 성차별’이 없다고 주장하는 대통령에게 여성노동자들의 실제적 삶은 안중에도 없는 노동시장 개편안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성별 임금격차 완화를 위해서는 단순히 출산·육아 기간에 임시적으로 머무를 수 있는 단시간 일자리만 양산하는 것, 현실과 동떨어진 임금체계 개편만 추진해서는 해결되지 않는다. 여성을 돌봄 책임자로 낙인찍지 않도록 보편적인 노동시간 단축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남성과 여성이 동일한 직무에서 일할 수 있는 환경, 남성중심의 노동문화를 해체하고 모두가 스스로를 돌볼 수 있는 환경이 우선되어야 한다.

 

전국 대학교수들이 올해 우리 사회의 모습을 표현하는 사자성어로 ‘과이불개(過而不改)’를 꼽았다. ‘잘못을 하고도 고치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한다. 노동개악을 담은 권고안에 대해 이미 대통령은 권고안을 토대로 조속히 정부입장을 정리할 것을 지시했다. 윤정부는 ‘과이불개’ 정부가 될 셈인가. 전문가의 얼굴을 하고 노동자의 일상을 파괴하고 정부의 기업 중심, 시장 중심 체제 개편을 꿈꾸는 ‘미래노동시장 연구회’의 권고안은 절대 수용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2022. 12. 14

여성노동연대회의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전국여성노동조합, 한국노동조합총연맹,

한국여성노동자회,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민우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