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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유래비석 (35)
少欲知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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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금동명은 이곳에 오동나무가 많았고, 가야금 만드는 사람이 살았기 때문에 전래되었다는 설과 병자호란때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가는 길에 이 지역의 백토고개에서 잠시 쉬면서 측근의 신하에게 무릎안쪽의 오금이 아프다고 말하자 그후부터 이곳을 오금골이라 부른데서 오금동 동명이 유래 되었다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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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십리는 무학대사와 관련된 전설로 잘 알려져 있으나 이곳이 도성으로부터 십리 떨어진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성저십리; 城底十里) 답십리와 같이 왕십리라는 동명이 생겨 났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고 상왕십리는 왕십리를 양분하여 위쪽에 자리 잡고 있음으로 상왕십리로 칭한 것이다. 도선동은 통일신라 때 비기도참설(祕記圖讖說)을 주장한 도선대사가 무학봉에서 수도했다는 전설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며, 또 조선 개국 때 무학대사가 태조의 명으로 도읍지를 물색하던 중 왕십리에 와서 지세를 살피고 있었는데 소를 타고 지나던 한 노인이 무학대사를 보고 서북쪽으로 10리를 더 가라는 지시를 하였다. 바로 이 노인이 도선대사로서 그가 현령(顯靈)하여 무학대사에게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동민들이 도선대사의 이름을 빌어 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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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뒷산에 북처럼 생긴 커다란 바위가 있어 이를 ‘북바위’라고 불렀고 이에 따라 북바위가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로 종암(鐘巖, 또는 鼓巖) 동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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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천사는 예산군 예산읍에 위치한 사찰로 655년에 의각 스님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의각은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귀국할 때 불상을 돌배에 싣고 백제 오산현 북포 해안에 이르러 알맞은 절터를 잡지 못하여 몇 달을 머물렀다. 이때 배안에서 치는 종소리가 강촌을 진동하여 마을 이름이 종경리가 되었다. 어느 날 금오 한 쌍이 날아오더니 지금의 절터를 일러주었기에 향천사는 현재의 절터에 자리잡게 되었다고 하며, 근처 산을 금오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창건 설화에 의하면 ‘향기로운 냄새가 흘러나오는 샘물’이 있어 이름을 향천(香泉)이라 하고, 의각대사(義覺大師)가 샘물 자리에 절을 짓고 향천사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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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동쪽에 있는 천장산(天臧山)의 지맥(地脈)이 검정 돌을 꼬치에 꿰어놓은 것 같기 때문에 '돌곶이 마을'이라고 불렸던 데에서 유래했다. 그러다 조선 20대 왕인 경종의 능인 의릉(懿陵)이 이 곳에 안치된 이후 돌곶이에 능(陵)자를 붙여 '돌곶이 능말(마을)'이라고 불렀고, 돌곶이라는 이름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석관(石串)' 이라는 동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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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골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이곳에서 먹을 만들었다는 데서 유래한 순 우리말 표기이며, 인근 봉화산 소나무 참숯으로 만든 먹은 품질이 좋아 궁중에 진상했다고 한다. 먹골은 대리(大里-큰말, 넘말), 중리, 후동, 왕방골로 나누어진다. 그중에서 대리는 큰골이라고도 했는데, 먹골 안에서는 제일 큰 마을로 현재 묵동3거리 일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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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목(面牧)이라는 동명은 이름의 한자 뜻에서 알 수 있듯이 목장 앞이라는 뜻이다. 원래는 구문계, 고문계, 곰계, 문계 등으로 불리던 넓은 들판이었는데 이곳에 말목장이 생기면서 면목이라는 지명이 붙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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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중랑천 근방에 국립 숙소인 송계원(松溪院)이 있어서 중랑천을 송계라고 불렀다고 한다. 송계교를 석교로 개축할 때 16살 되는 딸 하나를 데리고 사는 홀아비 장님 중이가 부역에 동원되자 그 딸이 남장을 하고 대신 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생리현상이 문제가 되어 대나무를 잘라서 옷 속에 넣어 관을 통해 서서 배뇨를 할 수 있게 하고, 되도록 적게 수분을 섭취하는 등 고생을 했다고 한다.이런 눈물겨운 사연을 전해들은 관아에서는 마침내 중이의 부역을 해제함으로써 부역을 대신하던 딸도 눈먼 아버지 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남자로만 알고 지내던 동료들이 그를 중낭자(仲郎子)라고 불렀으나, 사실은 남장 여인이라는 것을 알고 난 다음부터는 그녀를 중랑(仲娘)이라 불렀고 이후 중랑(中浪)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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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나루는 광장동에 있던 도선장으로 강폭이 넓은 곳에 나루가 있다하여 얻어진 이름이며 너븐나루라고도 불렸다.옛날부터 강원 충청 경기 등지의 곡류 및 목재 등의 운송길로 이용되었고 행인과 상인이 한양으로 들어가는 교통요충지로서 한양에 많은 사람이 모이고 물화가 집산되면서 광나루를 오가는 행인들이 많아져 더욱 번성하다가 1936년 광진교가 세워지면서 나루터로서의 기능을 잃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