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少欲知足
십자성 마을은 베트남전쟁에 파병되었다가 부상을 당한 전상자(戰傷者)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위해 강동구 천호동에 조성된 국가유공자촌이다.베트남 전쟁에 파병된 대한민국 국군 전상(戰傷) 용사들을 위해 박정희 대통령이 자금을 조달해 지은 마을로, 1974년 10월 31일 십자성마을로 이름붙인 뒤 지금까지 많은 국가유공자들이 거주하고 있다. 마을을 건립할 당시 원호처에서는 세대 당 정착 대부금을 보태 주었고, 박정희 대통령도 천사십만 원의 하사금을 내렸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 밖의 힘겨운 일은 해병여단에서 지원해 주었다.
미국의 감리회 선교사인 헨리 아펜젤러가 1885년 서울시 중구 정동에 세운 한국 최초의 근대식 중등교육기관이자 서울특별시와 대전광역시에서 학교를 운영하는 학교법인이다. ...............................................................
서래섬은 동작대교와 반포대교 사이에 있는 작은 인공 섬이다. 1980년대에 올림픽대로 건설 및 한강 종합개발을 하면서 조성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비슷한 위치에 반포섬이라는 섬이 있었다.섬이지만 강 한가운데가 아닌 강변에 자리 잡고 있고3개의 다리가 반포 한강공원으로 연결돼 편리하게 접근할 수 있다.높은 곳에서 조망하는 다른 곳과는 달리한강의 수면과 비슷한 높이에서 도시의 건물과 석양을 즐기는 것이 포인트다.
조선시대 이곳에서 말 1,000 마리를 기르면 용마(龍馬)가 난다하여 자마(雌馬), 즉 암말을 길렀기 때문에 자마장리(雌馬場里) 라 하였고 동명을 자마장리라 부르다가 자양동으로 전음(轉音)되었다. 광진구 일대는 넓은 평지라서 국가에서 목장지대로 지정했는데, 자양동은 그중 암말을 기르는 목장이었다. 일제 강점기 때, '자'의 한자가 雌에서 紫로 바뀌었고 자마장리에서 자양동으로 바뀌어 현재에 이른다.
고려 때 왕십리에 사는 경주 김씨네가 아들을 하나 낳았는데, 조그마한 어린 아이가 소를 끌고 풀을 먹이러 다녔다. 그런데 소가 풀을 먹으면 살이 쪄야 되는데, 점점 마르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몰래 아들을 따라 가 숨어서 엿보니, 아들이 쇠뿔 위로 올라갔다가 소의 배 밑으로 들어갔다가 펄떡펄떡 날아다니며 재주를 넘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혹여 다른 마음을 먹고 역적이 된다면, 집안이 망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집안 식구들이 모여 아들을 기름틀에다 눌러 죽이고, 집 안에 묻었다. 아들이 죽자, 액께산[아차산]에서 용마가 나와 펄펄 뛰고 피를 토하며 울다가 죽었다. 그리고 아들을 죽인 김씨네 집안은 망하고 말았다.
말미길은 옛날 이 일대 마을 사람들이 말을 많이 먹였던 곳으로, 말미라고 하였던 데서 유래되었다. 말미는 한자로 마산동 (馬山洞) 이다. 옛날 산에다 말을 많이 먹였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마산(馬山)에서 말뫼가 되고 말미로 변하였다.
오금동명은 이곳에 오동나무가 많았고, 가야금 만드는 사람이 살았기 때문에 전래되었다는 설과 병자호란때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가는 길에 이 지역의 백토고개에서 잠시 쉬면서 측근의 신하에게 무릎안쪽의 오금이 아프다고 말하자 그후부터 이곳을 오금골이라 부른데서 오금동 동명이 유래 되었다는 설이 있다.
왕십리는 무학대사와 관련된 전설로 잘 알려져 있으나 이곳이 도성으로부터 십리 떨어진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성저십리; 城底十里) 답십리와 같이 왕십리라는 동명이 생겨 났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고 상왕십리는 왕십리를 양분하여 위쪽에 자리 잡고 있음으로 상왕십리로 칭한 것이다. 도선동은 통일신라 때 비기도참설(祕記圖讖說)을 주장한 도선대사가 무학봉에서 수도했다는 전설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며, 또 조선 개국 때 무학대사가 태조의 명으로 도읍지를 물색하던 중 왕십리에 와서 지세를 살피고 있었는데 소를 타고 지나던 한 노인이 무학대사를 보고 서북쪽으로 10리를 더 가라는 지시를 하였다. 바로 이 노인이 도선대사로서 그가 현령(顯靈)하여 무학대사에게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동민들이 도선대사의 이름을 빌어 도선..
고려대학교 뒷산에 북처럼 생긴 커다란 바위가 있어 이를 ‘북바위’라고 불렀고 이에 따라 북바위가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로 종암(鐘巖, 또는 鼓巖) 동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향천사는 예산군 예산읍에 위치한 사찰로 655년에 의각 스님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의각은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귀국할 때 불상을 돌배에 싣고 백제 오산현 북포 해안에 이르러 알맞은 절터를 잡지 못하여 몇 달을 머물렀다. 이때 배안에서 치는 종소리가 강촌을 진동하여 마을 이름이 종경리가 되었다. 어느 날 금오 한 쌍이 날아오더니 지금의 절터를 일러주었기에 향천사는 현재의 절터에 자리잡게 되었다고 하며, 근처 산을 금오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창건 설화에 의하면 ‘향기로운 냄새가 흘러나오는 샘물’이 있어 이름을 향천(香泉)이라 하고, 의각대사(義覺大師)가 샘물 자리에 절을 짓고 향천사라 이름지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