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少欲知足
마을 동쪽에 있는 천장산(天臧山)의 지맥(地脈)이 검정 돌을 꼬치에 꿰어놓은 것 같기 때문에 '돌곶이 마을'이라고 불렸던 데에서 유래했다. 그러다 조선 20대 왕인 경종의 능인 의릉(懿陵)이 이 곳에 안치된 이후 돌곶이에 능(陵)자를 붙여 '돌곶이 능말(마을)'이라고 불렀고, 돌곶이라는 이름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석관(石串)' 이라는 동명이 되었다.
먹골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이곳에서 먹을 만들었다는 데서 유래한 순 우리말 표기이며, 인근 봉화산 소나무 참숯으로 만든 먹은 품질이 좋아 궁중에 진상했다고 한다. 먹골은 대리(大里-큰말, 넘말), 중리, 후동, 왕방골로 나누어진다. 그중에서 대리는 큰골이라고도 했는데, 먹골 안에서는 제일 큰 마을로 현재 묵동3거리 일대가 된다.
면목(面牧)이라는 동명은 이름의 한자 뜻에서 알 수 있듯이 목장 앞이라는 뜻이다. 원래는 구문계, 고문계, 곰계, 문계 등으로 불리던 넓은 들판이었는데 이곳에 말목장이 생기면서 면목이라는 지명이 붙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중랑천 근방에 국립 숙소인 송계원(松溪院)이 있어서 중랑천을 송계라고 불렀다고 한다. 송계교를 석교로 개축할 때 16살 되는 딸 하나를 데리고 사는 홀아비 장님 중이가 부역에 동원되자 그 딸이 남장을 하고 대신 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생리현상이 문제가 되어 대나무를 잘라서 옷 속에 넣어 관을 통해 서서 배뇨를 할 수 있게 하고, 되도록 적게 수분을 섭취하는 등 고생을 했다고 한다. 이런 눈물겨운 사연을 전해들은 관아에서는 마침내 중이의 부역을 해제함으로써 부역을 대신하던 딸도 눈먼 아버지 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남자로만 알고 지내던 동료들이 그를 중낭자(仲郎子)라고 불렀으나, 사실은 남장 여인이라는 것을 알고 난 다음부터는 그녀를 중랑(仲娘)이라 불렀고 이후 중랑(中浪)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
광나루는 광장동에 있던 도선장으로 강폭이 넓은 곳에 나루가 있다하여 얻어진 이름이며 너븐나루라고도 불렸다. 옛날부터 강원 충청 경기 등지의 곡류 및 목재 등의 운송길로 이용되었고 행인과 상인이 한양으로 들어가는 교통요충지로서 한양에 많은 사람이 모이고 물화가 집산되면서 광나루를 오가는 행인들이 많아져 더욱 번성하다가 1936년 광진교가 세워지면서 나루터로서의 기능을 잃게되었다.
옥수동의 동명은 옥수동에 산5번지에 있었다는 옥정수(玉井水)라는 위장에 좋다는 유명한 우물이 있었고, 그 우물의 이름을 따서 마을이름을 옥정숫골이라고 한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이 곳을 두뭇개, 두멧개 또는 한자음으로 두모주, 두모포(동국여지승람-도성 동남쪽 5리허,연산군일기 11년 5월 9일조에 등장)라고 불렀다.
뚝섬은 일대 지역이 범람원으로, 지대가 낮아 한강에 홍수가 날 때마다 물길이 생겨 섬처럼 보였기에 섬이라고 하였다. 임금의 행차를 알리는 纛旗를 세운 곳이라는 뜻에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뚝섬은 원래 ‘둑도’, ‘뚝도(纛島)’, ‘독도(纛島)’ 혹은 ‘살곶이벌’로도 불렸다, 뚝섬나루터는 조선 태조(太祖) 때 강에 떠내려 온 큰 깃발로 인하여 이곳에 독재소를 설치하고,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곳에는 경상도⋅강원도의 세곡(稅穀) 운송을 위하여 선착장을 두고, 한강을 오가는 세곡선(稅穀船)을 관리하다가 조선 후기에는 강원도에서 오는 목재가 모이는 곳으로 변하였고, 나라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세금을 징수한 바도 있었다.
고려시대부터 불렸던 지명, 송파. 소나무가 많은 언덕이라는 뜻의 ‘송파(松波)’에서 유래한 송파는 한강 연안에 위치한 지리적 여건으로 인하여 선사시대부터 신석기인들이 거주하였던 곳이다. 고대국가 성립과 함께 고조선의 생활무대가 되기도 하였고, 백제의 시조 온조왕부터 21대 개로왕까지 약 493년간 백제의 수도로 자리하기도 하였다.
의정부는 조선 태조가 함흥으로부터 한양으로 환궁할 때 이곳에 이르러, 태종에게 국새(國璽)를 넘겨준 뒤 환궁하지 않고 이곳에 계속 머물렀다. 그러자 조정의 대신들이 이곳까지 와서 정무를 의논하고 윤허를 받았다는 데서 의정부라는 명칭이 유래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하지만 의정부는 1796년보다 먼저 만들어진 동국대지도(1752)에 ‘녹양’이라 기록되어 있고 이 보다 후대에 만들어진 대동여지도(1861)에도 ‘녹양’이라 기록되어 있다면 당대에 통용된 우리고장의 명칭은 ‘녹양’이 맞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고지도의 대표적 작품인 위의 두 곳에서 ‘녹양’으로 기록된 것을 굳이 대표성을 갖추지 않은 ‘의정부’라는 지명을 강변할 일이 있을까? 더욱이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이름이라고 의정부시사에서도 언급하..
한다리마을은 큰 다리가 있었다고 해서 유래된 마을 이름으로 원래는 외다리였는데, 내시촌에 가마를 들이기 위해 큰다리가 놓여졌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 발행된 지도에는 한교(漢橋), 규장각의 고문서에는 대교(大橋 ), 일교(一橋 )로 표기되어 있다. 한(漢), 대(大), 일(一) 자 등은 우리 말의 크다는 뜻을 가진 한자 말이다. 이러한 자료들을 종합하면, 크다는 뜻의 우리 말 '한교', '대교', '일교'로 쓴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원 지명은 한다리인데, 일제 강점기에 발음이 흰다리고 바뀌고, 그 말이 다시 백교(白橋)로 바뀌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