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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비] 독립운동 대표마을 -하회마을 본문
하회마을 사람들은 나라의 위기 앞에서는 분연히 일어나, 1895년 을미의병을 시작으로 줄기차게 항일투쟁을 이어갔다. 그 가운데 류도발은 1910년 나라가 무너지자 단식 순국하였고, 아들 류신영도 1919년 3월 그 뒤를 따랐다. 아버지와 아들이 연이어 목숨으로 저항한 장엄한 역사를 남겼다.
그해 3월 27일에는 마을소년 20여 명이 만송정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 일로 류점등이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1920년대 들어 류창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며, 류병하와 류시태는 의열단 의거로 고초를 겪었다. 그 뒤에도 마을 사람들의 투쟁은 계속되었다. 류택하는 서울에서 학생운동을 펼쳤고, 류시승은 안동농림학교 학생항일운동을 이끌었다. 나라 밖에서는 류소우와 그의 아들 류시보, 조카 류시훈이 한국광복군으로 활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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