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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유산] 문익환 통일의 집

知足 2024. 3. 29. 12:12
민주화와 통일 운동에 힘썼던 문익환 목사가 1994년까지 거주했던 서울특별시 강북구 인수봉로 251-38에 위치한 가옥이다. 1970년대 이후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 논의의 현장으로서의 역사성을 갖고 있으며 평화통일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문화를 확산하기 위한 상징적 공간이다.

1966년 상공부에서 직원들을 위해 지은 약 90㎡(30평형) 면적의 단독주택으로 문익환 목사는 1970년 매입하여 1994년 작고할 때까지 거주했다. 1997년에 민주화운동의 일환으로 (주)건설노동자 공동체 ‘우리건설’에서 무료봉사로 내부 보수를 했다. 대문 밑에 ‘통일을 염원하는 건설노동자의 정성으로. 1994.4.19. (주)건설노동자 공동체 우리건설’이라는 표지석이 붙어 있다.

박용길 여사 개인이 고 문익환 목사를 추모하며 자택에 기념관을 조성해서 ‘누구나 통일을 논할 때 쓰는 공간’이라는 뜻으로 ‘통일의 집’이라 이름붙이고 방문객을 맞아오다가 2011년 여사가 사망한 이후 (사)통일맞이에서 잠시 사무실로 사용하기도 했다.

2018년 6월 1일 문익환 목사 탄생 100주년을 맞아 시민들의 모금으로 1990년대 초반 문익환 목사가 살았던 시기의 모습으로 복원하여 ‘문익환 통일의 집’ 박물관으로 재개관하였다. 통일의집 박물관에는 2만 5천여 점의 유품 중 일부를 전시하고 있다.

문익환(文益煥, 1918~1994) 목사의 호는 늦봄이며 만주 북간도에서 출생했다. 명동소학교와 은진중학교를 거쳐 평양 숭실중학교, 일본 동경신학교를 다녔다. 1947년에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미국 프린스톤신학교에 유학, 신학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해 한국신학대학과 연세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구약을 강의하기 시작했다. 한국신학대학 교수로 재직 시 1968년부터 8년간 신구교 공동성서번역의 구약책임위원으로 일했다.

1976년 명동성당 ‘3·1민주구국선언’을 시작으로 여섯 차례 총 11년 간 옥고를 치렀다. 1989년에 방북, 1993년에는 ‘통일맞이 7,000만 겨레모임 운동’을 주장하는 등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힘을 쏟다가 1994년 1월 18일 세상을 떠났다.

1991년 ‘오월시민상’ 수상, 1992년에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고 같은 해 제3회 4월혁명상을 받았다. 시집 『새삼스런 하루』(1973), 『꿈을 비는 마음』(1978), 『난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어요』(1984), 『두 하늘 한 하늘』(1989), 『옥중일기』(1991) 등과 수필집 『새 것, 아름다운 것』(1984), 『꿈이 오는 새벽』(1984), 『통일을 비는 마음>(1989), 『히브리 민중사』(1990), 『가슴으로 만난 평양』(1990) 등이 있다.

 

문익환 통일의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