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少欲知足
인천지구전투에서 산화한 유엔군 및 국군 장병들의 영령을 추모하고 인천상륙작전을 비롯한 각종 전투에서 거둔 혁혁한 무공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기념비이다. 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작전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부터 서울탈환, 그리고 10월 3일 의정부 탈환까지 성공적으로 수행된 미 제10군단(미 제1해병사단, 미 제7사단, 국군 제1해병연대, 국군 제17연대 등)이 북한군 서울지구방위사령부 예하 부대들을 격퇴한 작전이다. 인천광역시 수봉공원 내 위치한 인천지구전적비는 6·25전쟁 당시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헌신한 국군과 유엔참전용사를 기리기 위해 1980년 9월 15일 수봉공원에 건립되었다.
스승은 서기 1876년 11월 7일 황해도 봉산군 쌍산면 무릉골에서 태어나시어 19세 때인 1894년에 서울에 올라와 배재학당에서 신학문을 닦고 이로부터 20년 동안 우리 말글 연구와 교육 및 한글 운동을 하시다가 39세 되던 해인 1914년 7월 27일 작고하시어 유해는 서대문 밖 수색 고택골(현 서울시 은평구 신사동)에 안장하였다. 그 뒤 한글 학회가 1959년 10월 7일 「고 주시경선생이장추진위원회」를 발족시켜 스승의 묘소 이장과 묘비 건립을 서둘러 이전할 산지와 묘소가 마련되고 묘비(비문은 최현배 짓고 글씨는 정인승 씀)가 제작되어 「주시경 스승 이장식」과 「묘비제막식」을 1960년 10월 1일 경기도 양주군 진접면 장현리(현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 묘소에서 각계 인사들과 유족들 참배리에 거행..
한국군 파병은 1964년 9월 22일 140명 규모의 비둘기 부대를 시작으로 주월한국군 사령부의 지휘통제에 따라 청룡, 맹호, 백마, 십자성, 백구, 은마부대가 참전했다. 예산군은 이를 기리고자 지난 2006년 6월 예산읍 산성리 115-4 월남전 참전공원에 청룡, 맹호, 백마, 십자성, 비둘기, 백구부대 월남전 참전기념탑을 설치했으며, 2022년 12월 주월사한국군사령부 및 은마부대 기념탑을 추가 설치했다. 월남전 참전기념탑에는 예산군 출신 참전용사를 기리기 위해 참전용사 415명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예산군은 충남서부보훈지청의 협조와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의 용역사 등을 통해 관내 수형인명부, 판결문 등 증빙자료를 수집했다. 1919년 3월 3일 예산읍내 동쪽 산에서 있었던 충청남도 최초 3·1만세운동의 주역인 '윤칠영' 등 총 87명을 발굴해 국가보훈처에 서훈을 신청했다. 그 중 제적등본이 확인된 40명에 대해 지난 8월 서훈신청을 보완했으며, 최종 30명이 2021년 삼일절과 광복절 계기 공적심사 대상에 부의됐다.
이강덕은 1919년 3월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항의하여 전국에서 3·1 독립 만세 운동이 전개되자 3월 28일 오후 5시 같은 마을에 사는 심점봉과 함께 구리면 아천리 주민들에게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할 것을 권유하였다. 시위 때는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들고 수십 명을 이끄는 등 주도하였으며, 아천리와 이웃 마을 토평리(土坪里)·교문리(橋門里) 일대를 돌아다니며 시위를 벌였다. 이어 다음날 다시 아차산에 올라가 태극기를 산 위에 꽂고 독립 만세를 불렀다. 이로 인하여 일본 경찰에 붙잡혔으며, 1919년 5월 2일 경성 지방 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공소하였다. 그러나 1919년 5월 30일 경성 복심 법원에서 공소 기각 판결을 받았고, 다시 상고하였으나 1919년 7월 3일 고등 법원에서 기각..
세월호참사 10주기, 벌써 10년의 시간이 흘렀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그 날, 침몰하는 세월호를 보며 발을 동동구르고 눈물 흘렸던 시간들, 세월호 가족들과 광장에서 함께 비를 맞고 진상규명을 외치던 순간들… 여전히 그 목소리는 계속되고 있고 기억은 또렷합니다. 세월호참사 10주기를 맞아 진상규명-책임자처벌의 완수를 위한 다짐과 실천을 단단히 하고, 생명존중과 안전사회를 위한 연대를 이어가며, 기록과 기억을 정리하고 그 의미를 확산하는 시간으로 만들어 갑니다. 또한 세월호참사 10년을 함께 아파하고, 마음을 보태준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준비합니다. 세월호참사 10주기 사업에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한 눈에 보기 세월호참사 10주기 기억식 및 추모식 세월호참사 10주기 시민위원 세월..
안창남이 조선에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지에 안창남에 관한 기사가 실린 때 부터이다. 1922년 12월 5일, 안창남은 5만여명의 인파가 지켜보는 귀국하여, 10일에는 한반도 모양을 그려넣은 금강호(金剛號) 를 타고 모국 방문 비행을 하였다. 이 당시 안창남의 인기는 "떴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 내려다 보아라 엄복동 자전거"라는 가사의 '안창남 비행기'라는 노래가 나올 정도로 대단했다. 모국 방문을 마친 뒤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 안창남은 1923년에 관동대지진이 일어나자, 조선으로 돌아온다. 1924년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조선청년동맹에 가입하는 등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여의도 공항은 해방 후 광복군 이범석, 노능서, 장준하, 김준엽 등 대한광복군이 미군의 인솔 아래 C-47기를 타고 환국한 곳이 ..
1960년 3월 15일의 정부통령선거는 ‘사상 최대의 부정선거’로 온 국민의 분노를 유발시켰고 선거 당일인 3월 15일 전국 곳곳에서 부정선거에 대한 항의가 터져 나왔는데, 그중 마산에서 경찰 발포로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3월 방학을 마치고 4월 개강한 서울대생들도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기 위해 움직였다. 4월 11일 김주열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된 직후인 4월 14일 문리대 정치학과 3학년 학생들은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를 결의하여 11개 단과대학이 함께 19일 오전 11시에 궐기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하루 전 날인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시위를 하다가 정치 깡패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19일 아침 대광고 학생들이 시위에 나서자 서울대 학생들은 ..
[기념관] 몽양 여운형 생가·기념관 한반도의 독립유공자, 통일운동가, 정치인, 언론인, 체육인. 몽양(夢陽)이라는 아호와 '3.1 운동의 기획자'로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최순위권에 꼽히는 인지도와 영향력, 정치적 입지를 가진 혁명가이자 정치인이었다. 독립운동에 있어서는 3.1 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에 참여했고 언론 활동, 민족 문화 사업, 체육 활동 등 다채로운 분야에서 이름을 날렸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이 가까워지던 1944년 조선건국동맹을 구성하여 해외 독립운동 단체들과 연계를 시도하였으며 8.15 광복 직후 조선건국동맹의 조직을 확대하여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혼란 정국을 예방하였으나 미군정이 건준을 인정하지 않자 여운형은 미군정기 정치인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이후에 미..